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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구석이라는 함정

[2021-09-10 오후 3:25:15]
 
 
 

사회적 통념의 선을 넘고 경우를 벗어나 무례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을 가끔 보게 된다. 그때 사람들은 말한다.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라고. 그런데 정작 믿는 구석을 제공한 사람은 잘 모르고 있다. 자신이 다른 사람의 믿는 구석이 돼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권력을 가진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면 그 권력의 정도나 자리의 높낮이를 떠나 항상 말과 행동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특히 가까운 친인척이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는 지나치리만큼 밝고 투명하게 유지해야 한다. 공적인 일에 분명히 선을 긋지 않고 여운을 남기면 곧바로 믿는 구석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어렵고 힘든 고비를 수없이 겪게 된다. 그때마다 누군가를 원망하곤 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그 수렁은 모두 자신이 만든 것이다. 스스로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결과이다.

예부터 사대부들에게는 집안일을 돌보고 잡무를 처리해주는 겸종(傔從)이 있었다. 사대부가 벼슬을 얻어 지방의 수령으로 나가게 되면 보통 겸종들을 데리고 가는데 이들은 주공의 경제적인 이익을 챙기면서 자신의 잇속도 함께 챙기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겸종이 온갖 부정부패의 원인이 된다는 점이다. 겸종은 공직자도 아니고 그냥 주공을 도와주는 사적인 일꾼일 뿐이다. 그런데 백성을 대하는 그들의 행동은 방자하고 안하무인격이었다. 그들의 믿는 구석이 누구인지는 비밀도 아니다. 주공과 겸종의 관계는 수십 년씩, 경우에 따라서는 몇 대에 걸쳐 매우 가까운 사이로 유지돼 오기도 했다. 따라서 그들의 부정행위는 끊을 수 없는 일상이 되었고 서로가 믿는 구석이 되었던 것이다.

A 씨는 초등학교에서 주무관으로 이십여 년 근무하다가 얼마 전 퇴직하고 지금은 시골에서 조그만 과수원을 관리하고 있다. 참으로 사람됨이 반듯하고 생각이 맑은 분이다. 나이 서른 가까이 되도록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부모 속을 썩이던 아들이 어느 날 느닷없이 공무원을 하겠다고 했을 때 그는 아들에게 말했다.

공무원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공직자는 자신의 수고로움 보다는 나라와 국민의 이익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 마음의 그릇이 크고 언제나 행동에 진심이 담겨 있어야 한다. 애비인 내가 너를 모르겠느냐. 그냥 겉으로만 공익을 위하는 척 하면서 행동에 진심을 담지 못하면 나라에 손해만 끼칠 뿐이다. 그러니 공무원 보다는 다른 직업을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라고.

어쩌면 이 말이 충격을 주어 아들을 거듭나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아들은 결국 공무원이 되었고 지금은 중앙부처의 모 기관에서 사무관으로 승진해 열심히 근무하고 있다.

자식의 마음에 큰 상처를 줄 수도 있는 이런 충고를 할 수 있는 아버지가 몇이나 될까? 보통의 아버지들은 공무원이 최고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세월만 가면 꼬박꼬박 월급 나오는 가장 안정된 직업이지. 너도 공무원이나 해라.” 라고 말하지 않을까.

얼마 전 현직에서 같이 근무했던 사람 넷이 자리를 가졌다. 물론 그 자리에 A 주무관도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A 주무관이, “오면서 보니 ??마을. ??씨 장남 김??. 사무관 승진을 축하 합니다라는 현수막이 도로를 가로질러 큼직하게 걸려있던데 보셨나요?” 라고 물었다.

우리는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보았다면 어떤 생각들을 했는지를 그는 묻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현수막에 대해서 그는 어떤 것도 더 말하지 않았다. 내가 A 주무관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 분의 평소 생활 모습을 보고 느낀 바가 컸기 때문이다. 작년에 그의 아들이 사무관으로 승진 했을 때 함께 근무했던 몇이서 축하주를 사겠다고 했지만 그는 기어코 사양했다.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알리고 말고 할 게 뭐 있습니까? 좀 더 큰일을 맡게 되었으니 공직에 대한 책임감만 무거워 졌지요.” 라는 대답만 했다.

물론 아들의 승진 사실도 한참이 지나 우연한 자리에서 알게 되었다. 그동안 몇 번 전화도 하고 만남도 있었지만 결코 아들의 승진 사실을 스스로 말하지 않았다.

공직자는 자신의 출세를 자랑하는 마음은 온전히 내려놓고 직위가 오를수록 더 큰 책임감과 겸손으로 국민에게 봉사하는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 그러면 선민의식에 물들어 국민을 내려다보는 모습이나 빗속에서 무릎을 꿇고 우산을 받쳐 든 또 다른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될 것이다.

공직자를 선발할 때는 보통 시험을 통해 공개경쟁으로 선발하게 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특별채용이라는 방법도 있는 모양이다. 고위직에 있는 권력자들이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서 공직을 맡기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채용과정의 정당성을 두고 문제가 제기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공개채용이든 특별채용이든 공직자는 국민의 세금으로 보수를 받고 국민의 이익을 위해 공무(公務)를 맡게 된다. 그런 만큼 투명하게 채용과정이 공개되어야 하고 자격요건도 자리에 맞는 전문성과 관련경력을 반드시 요구해야 한다. 나라 일을 맡을 공직자를 뽑는데 사적 감정이 개입되는 순간 공익은 그 명분을 잃게 된다.

제대로 된 검증과 투명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힘의 작용에 의해 공직을 얻게 되면 여러 가지 바람직하지 못한 일들이 생길 수 있다. 물론 모두가 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도 있지만 다음과 같은 우려도 하게 된다. 우선 전문성의 부족으로 공익을 해 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인사들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여우가 호랑이의 그림자를 빌려 위세를 과시하는 호가호위(狐假虎威)의 모습을 보여 줄 수도 있다. 그러니 믿는 구석이라는 치명적 허점을 제공하는 공직자는 가랑비에 옷이 젖어들 듯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헤어날 수 없는 깊은 함정에 빠져들 수 있다. 이미 우리는 오래 전부터 이와 관련한 크고 작은 일들을 많이 보아 왔다.

다모클레스의 검’ - 그리스 전설에 나오는, 권력의 위태로움을 경고하기 위한 우화이다. 높은 자리에서 권력이 주는 행복에 취해 있다가 고개를 들어 위를 보는 순간, 한 올의 말총에 매달린 예리한 칼이 자신의 머리를 향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권력은 일촉즉발의 위험과 함께 함이다. 권력이 높을수록 매달린 칼에 가까이 다가간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자리가 높아지는 것을 자랑하는 공직자는 하수 중에 하수이고, 성실한 공직수행으로 스스로 자존감을 높이고 행복을 느끼는 공직자는 상수 중에 상수다

 

정상진/前밀양초등학교 교장, 한국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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