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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만남(10)

[2020-04-29 오후 2:23:29]
 
 
 

제3장 우국(憂國)의 밤

 

이상한 만남(10)

 

“서방님! 지금 소인보고 퉁소를 불어 보라고 하명하셨습니껴?”


충직한 심복인 김 서방의 눈에도 중산의 태도가 이상했던지 먼 산만 바라보고 있는 그의 쓸쓸한 뒷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지켜보고 있다가 그 진의를 확인하려고 다시 물었다.


“김 서방, 이건 명령이 아니라 부탁하는 것이라네!”


“하늘같은 서방님께서 하찮은 소인놈에게 부탁을 하시다니, 당치도 않으신 말씀입니다요! 그런데 시상에 우찌 이런 일이…!”


전에 없던 일이고, 집안에서 여전히 금기시 하는 일이기에 김 서방은 덜컥 두려운 생각부터 드는 모양이다 .


“심란해서 그런다네. 아마도 자네의 퉁소 소리는 이럴 때 듣는 게 제 격일 게야. 그러니 어서 한번 불어 보게나!”


“아! 예, 예…. 그러시다면야 기꺼이 불러 드립지요!”


다른 때 같으면 오래 살다 보니 별 희한한 꼴도 다 보겠다며 속으로 웃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 서방은 군소리 없이 혓바닥으로 마른 입술을 축이고는 퉁소를 입으로 가져간다.


그리고 몇 번이나 호흡을 가다듬은 그는 있는 재주를 다 부려 가며 퉁소를 불기 시작하였다. 응어리진 가슴마다 시름을 접고서 신들린 사람처럼 흥겹게 춤을 추던 민초들의 설움을 생각하면서 불고, 그 모양을 보고 가슴이 아파서 저렇게 못내 심란해하는 상전을 위해서 부는 것이었다.


나라 잃고 땅도 잃은 민초들의 가슴처럼 속은 텅텅 비고 구멍마저 적지 않게 숭숭 뚫려버린 하찮은 악기이건만, 그래도 곧게 자란 대나무 중에서도 가장 실한 것을 골라 베어다가 직접 자르고 다듬어 만든 소중한 퉁소였다. 그래서 그의 퉁소 소리는 더욱 구성지고 처량한지도 모르겠다.


쓸쓸한 저녁 강바람을 타고 끊임없이 밀려 와서 뱃전에 부서지는 작은 물결 소리마저도 올올히 가슴을 저며 놓는 황혼빛의 저녁 어스름 속에서 소복한 청상(靑孀)처럼 목놓아 흐느끼는 김 서방의 구슬픈 퉁소 소리는 뒤에 두고 온 인정에 한사코 이끌리는 마음처럼 자꾸만 뒤 쪽으로 흘러가는데, 기폭 가득 바람을 안은 황포돛배는 날 저문 응천강 물굽이를 따라 무거운 정적을 소리도 없이 가르며 하류로 하류로 흘러서 간다.
 

김 서방은 말과 나귀가 서 있는, 돛대 옆의 뱃전에 걸터앉아 퉁소를 불었고, 중산은 늙은 사공이 지키고 있는 돛배의 후미진 좌판 앞에 우뚝 서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주인을 섬기는 충복은 퉁소에 혼을 불어넣는 명인의 위치로 돌아가고, 주인은 그 소리의 품격을 알아주는 단 하루만의 한량이나 풍류객이라도 되어 버린 것일까. 정말로, 하인의 퉁소 소리가 듣고 싶어진 주인도, 그에게 충성을 바쳐 온 하인도 이때만큼은 아무 격의도 없이 마음과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그동안에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하였던 애달픈 감정의 소통을 구슬픈 퉁소 소리를 통하여 함께 누리며 교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구슬프기 짝이 없는 김 서방의 퉁소 소리에 몇 안 되는 다른 길손들도 넋이 빠진 모습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허름한 바지저고리 위에 검정색으로 물들인 광목 두루마기를 걸치고, 질끈 동여맨 행전에다 패랭이까지 눌러 쓴 우람한 체구-.


갑오민란 이듬해에 역원제가 철폐된 뒤 국권을 침탈한 일제에 의해 대대로 부쳐 먹던 역원 둔토(屯土)를 하루아침에 빼앗긴 뒤 부친은 얼마 못 가서 홧김에 죽고, 모친을 따라 문전걸식으로 연명하다가 그 모친마저 병들어 죽은 후에 스스로 종놈이 되어 살길을 찾고 나서 주인에 대한 충성만이 유일한 신앙이 되어 버린 김 서방이었다.


어쩌면 그는 지금 자기의 그런 인생역정을, 그 절절한 충성심을 수십 년 묵은 원한인 양 통렬한 퉁소 소리에 담아서 그렇게 역설적으로 토로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핏빛 노을에 물들어 있는 강물처럼 그의 퉁소 소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애조를 띠어 가고 있었다. 정말로 오늘 따라 김 서방은 피를 토하며 봄밤을 새워 운다는 두견새보다도 더 서러운 악공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어쩌면 지금은 그도 어쩔 수 없이 서러운 한 민초의 자리로 돌아와 그렇게 처절한 가슴으로 신들린 사람처럼 퉁소를 불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중산의 가슴에 젖어 있는 비애가 아까 보았던 감내 마을의 그 민초들한테서 온 것이라면, 김 서방의 퉁소 소리도 어쩌면 나라 잃은 설움에 송죽 같은 가슴으로 흐느끼며 토해 내는 피어린 조선 민족의 통곡은 아닐는지! 

정대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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