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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마을(2)

[2020-05-29 오후 4:13:19]
 
 
 

3장 우국(憂國)의 밤

 

안개 마을(2)

 

중산은 지금 <감내 게줄 당기기> 민속놀이 현장에서 보았던,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하여 아비규환을 만들어 내던 민초들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 서방님. 명심하고 분부 받들겠습니더!”

그리고 서 서방! 행여라도 저 사람들에게 언짢은 기색을 보여서 마음 상하는 일이 있게 해서도 결코 아니 될 것이네!”

청지기의 소임이 내방객들을 상대하는 일이다 보니 의관을 갖춘 양반님네들은 몰라도 불쌍한 민초들에게는 그의 존재가 다락같이 높은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겠기에 해 보는 소리였다.

명심하겠습니더, 서방님!”

오늘 따라 중산의 단속이 예사롭지 않다고 여겼음인지, 서 서방은 허리가 땅에 닿도록 굽실거린다.

멀쩡한 마을 사람들까지 명절에 나오는 기름진 고깃국을 얻어먹으려고 눈치를 살피면서 어린 식솔들을 떼로 내보냈다고 하지만, 벌써 음력 오월이니 절량농가가 생겨날 춘궁기가 다 된 것이다.

해마다 오뉴월 보릿고개로 접어들게 되면 이렇게 구휼미로 밥을 삶고 국을 끓여 사방에서 밀려드는 민초들의 주린 배를 채워 주는 일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었다. 민심은 천심이요, 농사는 천하지대본이라 하였으니 수많은 소작인들의 힘을 빌려 농사를 지어야 하는 대지주의 입장으로서는 결코 소홀히 할 일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적잖은 곡식들이 축나는 것은 그들이 신경 쓸 바가 아니더라도, 일일이 밥을 삶아 내고 국을 끓여 사람마다 공평하게 나누어 주는 일을 춘궁기 내내 조석으로 이렇게 반복해야 하니 그 일을 감당해야 하는 남녀 하인들로서는 여간 벅차고 진력나는 일이 아닐 터였다.

그렇다고 조상 대대로 행해 온 구휼사업을 이제 와서 중단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일제에 농토를 빼앗기고 헐벗고 굶주리다 못해 만주로, 연해주로 살길을 찾아 떠나는 민초들의 눈물겨운 행렬이 끊이질 않고 있는 참담한 시절이 아닌가.

서 서방에게 급식작업에 대해 각별하게 당부를 한 중산은 말과 나귀를 끌고 축사로 갔던 김 서방이 돌아오자 그에게도 특별히 당부를 한다.

이보게, 김 서방! 얼른 저녁밥을 먹고 오늘은 자네가 여기서 급식 일을 좀 챙겨 주어야겠네.”

아무래도 서 서방만으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리라.

서방님, 무신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더!”

상전을 모시고 먼 길을 다녀오느라고 고단할 법도 하련만, 김 서방은 언짢은 빛이 전혀 없다. 중하고 어려운 일일수록 보다 믿음직한 충복에게 시킨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가 중산을 모시고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서방님, 어서 오시이소!”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는지, 세 살배기 김 서방의 딸을 데리고 나와 행랑 마당에서 노닥거리고 있던 삼월이가 멀찍이서 중산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다. 그러더니 뒤따라가는 김 서방에게 쪼르르 다가서며 귀엣말로 묻는 것이다.

을순이 아부지, 서방님 저녁 진짓상을 차려 올릴까예?”

남들은 아직도 일손을 놓지 못하고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는 판국에,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미 없는 남의 어린아이에게 새털 같은 머리를 땋아 앙증맞은 작은 댕기까지 물려가며 예쁘게 치장을 시켜준 걸 보면 김 서방에 대한 정성이 여간 곰살맞지가 않다.

그러나 김 서방은 그게 오히려 더 부담스럽고 고깝게 여겨졌던지,

허허, 당연히 서둘러 차려 올려야지, 그기이 말이라꼬 하나?”

하고 퉁명스럽게 내뱉는다. 그러자 앞서 가던 중산이 그 소리를 들었는지 한 마디로 딱 잘라 버린다.

밥 생각이 없으니까 저녁상을 올릴 것 없네, 그만들 두게!”

사실, 안채 후원에 자리 잡은 용화당으로 곧장 향하는 중산의 마음은 입맛이 없을 정도로 산란하였다. 머리에 가득 찬 잡다한 생각으로 식욕을 잃어버린 그는 품속에 지닌 밀서를 더듬거리다가 목이 타는 갈증을 느끼면서 마른 침을 삼킨다.

천기(天機)에 버금가는 기밀이 담긴 문서니라! 달리 첨언하지 않더라도 알겠지만, 정경부인께서 친견하시도록 네가 직접 갖다 드리도록 하여라.”

천둥소리처럼 증폭된 운곡 선생의 지엄한 목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면서 머리 꼭대기에서 울려 퍼지는 듯하였다. 그렇게 지중한 기밀문서라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달린 일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도 왜놈들의 조사와 취조가 계속되고 있는 광복단 사건과 관련된 문서인지도 모르지 않는가.

중산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등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쩌릿한 전율을 느끼면서 넓디넓은 집안을 빙 둘러본다. 처마 끝마다 내걸린 장명등의 안온한 불빛들이 자욱이 깔린 밤안개와 함께 온 집 안을 천상의 별천지처럼 만들어 놓고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찾아 온 시인묵객들과 내방객들이 차지한 사랑의 객실마다 환하게 밝힌 황촉으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지만, 집안은 어쩐지 전에 없이 깊은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괴괴하다고 해야 하나, 쓸쓸하다고 해야 하나.

오늘따라 왜 이리도 섬뜩한 기분이 드는 것일까.

중산은 졸지에 살얼음 같은 시국의 한복판에 홀로 서 있게 된 것처럼 무거운 중압감을 느끼면서 심호흡을 한다. 그러나 모골이 송연하도록 첨예하게 뇌리에 각인 찍힌 오늘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되살아나고 있어서 천근만근이나 되는 가업의 하중을 감당해야 하는 두 어깨와 마음은 어디까지나 무겁기만 하였다.

정대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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