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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내에 부는 바람(5)

[2020-09-14 오후 2:16:14]
 
 
 

3장 우국(憂國)의 밤

 

성내에 부는 바람(5)

 

죽명 선생은 고삼종 목사의 주선으로 관식과 인식 남매가 서울 서소문 밖의 워랜이란 호주 선교사 집에서 기숙하며 편하게 서울 유학 생활을 하게 된 데 대하여 고삼종 목사가 세운 이 교회의 장로로서 누리는 큰 축복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곳 밀양은 호주 장로회 선교회 본부가 있는 마산 선교 지역에 속했는데, 밀양 지역에서 덕망과 재력을 겸비한 고삼종 목사는 의료 선교사업에 주력하던 호주 장로회 선교회 소속의 어빈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전수받아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으며, 대구 부흥집회에서 큰 은혜를 받고 부북면 춘화리에 있는 춘화교회에 입교하여 십여 년 간 예수를 믿으며 교회 설립을 위하여 기도하다가, 1908115일에 이곳 밀양읍 내일리에 사재를 털어 교회를 세웠던 것이다.

지난번에 마산 부흥회에 갔다가 워랜 선교사를 만났는데, 민 장로님의 자녀분들이 젠틀 넘버원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입디다.”

그분께서 철없는 우리 애들을 그렇게 좋게 봐 주시니 그것도 다 주님과 주님의 뜻을 전파하시는 목사님의 은혜와 축복 때문이 아니겠습 니까!”

두 사람이 이렇게 얘기를 주고받고 있는 사이에 나머지 인사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면면을 보면, 지방위원회를 거쳐 밀양면장이 된 이성희, 식산조합과 금융조합의 박장억, 이영집, 안삼득 씨를 비롯하여 무역업, 금융업, 잠사업과 같은 각종 업종과 식산조합, 밀양장업회, 금융조합과 같은 각 기관을 대표하여 나온 인사들이 모두 스무 명이 넘었고, 심지어 기독교 청년회 회장인 김병환도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는데, 그를 제외하면 모두가 이름을 대면 읍민 모두가 알 만한, 만만찮은 재력을 갖춘 지역 유지급 인사들이었다.

회의 시간을 기다리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끝에 돌아가며 인사를 나눈 그들이 모두 탁자 주위의 의자에 겹겹이 빙 둘러 앉자 회합 장소를 제공한 고삼종 목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였다.

공사다망한 중에도 우리 교회에 초대된 모든 분들이 이렇게 한 분도 빠짐없이 다 나와 주신데 대하여 이곳 주인으로서 고맙다는 인사 말씀부터 먼저 올립니다. 그리고 전지전능하신 우리 주 예수님을 기리는 이 거룩한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오늘의 회합이 주님의 뜻 안에서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믿으면서 오늘 이 모임을 주선해 주신 우리 이성희 면장님을 소개해 올립니다. 그러면 면장님께서 먼저 오늘 모임의 취지부터 말씀해 주시겠습니다.”

고 목사의 소개로 자리에서 일어난 이성희 면장은 감개무량한 얼굴로 참석자 모두의 얼굴을 일일이 하나하나 훑어보고 나서 목청을 가다듬고 점잖게 입을 열었다.

안녕들 하십니까? 밀양면장 이성희올습니다. 공사다망한 중에도 초빙에 응하여 이렇게들 많이 왕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자리는 우리 밀양읍교회와 대종교 밀양지사의 청년회가 현 시국을 타개해 나가기 위하여 애국 청년운동 단체를 만들기로 했는데, 그 지원 방안을 모색하기 위하여 마련한 것입니다. 여러 가지 직종과 여러 기관에서 일하고 계시는 우리 밀양의 유지급 인사들이 이렇게 모두 한 자리에 모이기란 참으로 어렵고 드문 일이라 사료됩니다. 그러니 오늘은 주최 측의 뜻에 따라 우리 지역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시국에 관한 문제점들과 그 대책들을 의논하는 장소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우리 밀양군에는 우리보다 훨씬 유식하고 영향력이 큰 명문 사대부 집안도 많고 인재들도 많습니다만, 내로라는 유림의 인사들은 소위 위정척사라고 하는 배타적인 이념에 사로잡혀 타 종교를 사교(邪敎)라 백안시 하여 우리와의 연합을 도외시한 채 자기네들 끼리 독불장군 식으로 의병운동을 한답시고 기고만장하여 설치면서 이념의 갈등으로 내홍을 겪다가 그나마 내부 변절자의 고발로 촉발된 소위 광복단사건을 겪은 뒤로는 복벽주의계 따로, 공화주의계 따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고 하더이다. 형편이 이러하니 현하의 시국이 안고 있는 국권 회복 문제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제반 문제점들을 놓고 그 타개책을 강구하기 위해 대종교와 기독교계의 우리 밀양 청년들이 연합하여 가칭 <밀양청년 독립단>이란 비밀결사 단체를 결성하기로 뜻을 모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런 때에 밀양성 안팎에 사는 개명한 우리 상공인들만이라도 먼저 뜻을 모아 청년들이 펼치고자 하는 사회운동의 지원 방안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의논해 보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먼저 이곳 밀양읍교회의 기독교 청년회 회장 일을 맡아 하고 있는 김병환 군의 얘기부터 먼저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면장의 인사말과 소개가 끝나자 앞으로 나온 김병환은 원탁을 중심으로 빙 둘러 앉아 있는 기라성 같은 자기네 지역의 유지급 인사들에게 사뭇 상기된 얼굴로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를 올린다. 그리고는 떨리는 손으로 양복 호주머니 속에서 미리 작성해 둔 원고를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한 마디 한 마디 읽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존경하는 우리 밀양 지역의 유지, 명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밀양읍교회에서 기독교 청년회 회장 일을 맡아서 하고 있는 김병환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밀양면 안에는 우리 말고도 밀양청년회가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력으로 왜놈들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그들처럼 야학운동이나 계몽운동, 봉사활동과 같은 미온적인 사회운동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고, 무력으로 하는 독립 투쟁만이 최상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 청년회에서는 대종교 밀양지사의 청년단과 연대하여 뜨거운 피가 가슴 속에서 들끓고 있는 열혈 회원들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 투쟁에 나서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하지만 조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피끓는 의기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고, 우리 지역을 대표하는 여러분들과 같은 유지 분들의 물질적인 지원과 정신적인 협조가 독립 투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절대적인 요소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 기독교 청년회와 대종교밀양지사의 청년단이 일체가 되어 결성하는 <밀양청년독립단>이 하는 일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져 주시고 그와 더불어 물심양면으로 많은 지원을 해 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정대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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