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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만나다

[2020-09-23 오후 4:31:23]
 
 
 

아침 이슬에 흠뻑 젖은 잔디 위를 걷다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여유롭게 떠 있는 흰 구름과 청자 빛 하늘이 무척 한가롭게 보였다. 조금은 남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햇살이 거실을 살며시 들여다본다. 문득, 가을 햇살은 조금은 마르고 까칠한 그러나 해맑은 눈동자를 지닌 시골 소년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 번의 가을이 가까이 다가 왔음을 몸과 마음으로 충분히 느끼고 있음이다.

며칠 전에는 비가 조금 내렸다. 빗줄기는 차츰 색깔이 바래어 가는 잔디 위로 세상의 모든 소리들을 흡수하며 천천히 내려앉았다. 갑자기 고요 속으로 빠져들었고 가을비와 함께 적막함이 밀려왔다. 한참 빗줄기를 바라보다가 오늘 같은 날 읽으면 좋을 책이 있는지 찾아보기 위해 내 작은 놀이터(서재 겸 공방)에 들어섰다.

책장을 둘러보다가 서가의 한쪽 모서리에 세워져 있는 LP레코드판에 눈길이 멎었다. 수십 년 동안 여러 번의 이사를 하면서도 잘 간직해 온 오래된 물건이다. 한국가곡전집(성음사)과 세계영화음악전집(성음사) 등이다. 오래된 박스의 빛바랜 표지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으로 먼지를 닦아냈다. 전집은 한 박스에 열 장씩 들어있다. 박스를 열고 한 장 한 장 들여다보니 지금도 그 많은 음악의 멜로디를 마치 긴 이야기의 줄거리처럼 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주 오래전 아무런 문화혜택을 누릴 수 없었던 산골의 초임학교에서 이 LP레코드판을 통해 듣는 음악은 유일한 문화생활이었다. 하늘과 산과 들판과 시냇물만을 바라보면서 학교와 시골집의 작은 방을 오가며 온전히 젊음의 날들을 보내야 했던 그 시간들. 봄이 여름이 가을이 또 겨울이 몇 번씩 지나갈 동안 음악이 없었더라면 그 무료함의 순간들을 어떻게 이겨 낼 수 있었을까? 턴테이블을 같이 보관해 오지 못한 것이 참 아쉬웠다. 같이 보관하고 있었더라면 지금 당장 가고파」 「목련화」 「LOVE ME TENDER를 들으며 오래 전 그날로 돌아가 보는 건데.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새삼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단순히 오래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는 어떤 물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이 든다거나 소중한 것으로 인연을 맺는 것은 살아있는 생명체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물건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그 물건을 소중히 생각한다는 것은 그 물건으로 인한 특별한 사연이 있거나, 긴 시간 동안 한 몸처럼 가까이 두고 늘 사용했던 까닭일 것이다. 그러니 내가 이 LP판을 구입해서 그냥 책장에 꽂아 두기만 하고 지금까지 지내 왔더라면 이것이 나에게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겠는가? LP레코드판은 아주 오래전 내 청춘의 어느 한 시기에 외로움을 이겨 낼 수 있도록 따뜻한 마음의 양식을 제공해 주었다. 그래서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물건이다. 이렇듯 가을은 오래되어 희미해진 옛 기억들을 온전히 되돌려 주기도 하는 멋진 계절이다.

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어느 유명 인사는 그의 자서전에 이렇게 써 놓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를 치르기 위해 한국에 갔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 긴 시간 동안 아무것도 생각나는 게 없었다. 한국에 도착하면 누구를 만나서 무슨 의논을 하고 어떤 절차를 거쳐 장례를 마무리해야 할 것인지는 물론이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어떤 마음과 표정으로 뵐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장례식장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낯익은 친숙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내 스스로가 마치 잘 모르는 사람의 장례식에 피치 못해 참석한 손님같이 느껴졌다. 몇몇 사람들은 나를 보고 누구인지 묻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친척 중 한 분은 조문객이 오면 곡()을 해야 하고 슬픈 표정을 지어야 한다고도 말했다.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서 50년 이상을 살아왔다. 참으로 긴 시간이다. 굵은 눈물방울을 흘리고 슬피 울고 싶었다. 그러나 함께 겪었던 어려운 시간도, 함께 즐거워했던 시간도, 애틋함도 연민도 도무지 생각나는 게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해서 눈물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슬픔을 느끼지 못하고 눈물을 흘려 보려고 해도 눈물샘을 자극하는 기억이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보다도 아버지와의 영원한 이별을 앞에 놓고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 슬펐다라고.

유명 가수의 콘서트에 가보면 언제나 클라이맥스는 그 가수가 불렀던 가장 유명한 노래를 부르는 순간이다. 신곡이 콘서트의 절정을 장식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노래가 되기 위해서는 제법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노래가 대중의 옆에 늘 가까이 머물러 있어야 한다. 생소하고 어려운 문장이나 단어 또는 외래어를 쓰는 것보다 일상의 편한 말을 문장화하면 더 친밀하고 이해하기 편하다. 그 뿐인가, 오래 사용해온 물건은 어두운 곳에서도 어렵지 않게 쓸 수 있고, 평생을 늘 가까이 해 온 부부는 자다가 얼굴만 한 번 쓰다듬어 보거나 손만 살짝 잡아 보아도 내 짝임을 알 수 있다.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 필요하다. 그리고 깊은 애정이 깔린 두터운 인연을 쌓는 것은 한꺼번에 벼락치기로 할 수는 없다. 일상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조금씩 저축하듯 쌓아가야 한다. 특히 가족끼리는 더 그러하다.

가을은 오래된 것과 소중한 것들을 천천히 여유를 갖고 되돌아보는 깊은 사색의 계절이다.

 

정상진/전밀양초등학교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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