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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하다는 것

[2020-11-12 오후 1:14:56]
 
 
 

영국의 철학자이자 사회사상가이며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버트런트 러셀(Bertrand Russell)이 콜럼비아대학교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다. 강연이 끝난 후 한 학생이 질문을 했다. 러셀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한동안 턱을 괴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학생이 질문한 내용을 정리해서 학생에게 질문의 내용을 되물었다.

학생이 질문한 내용이 이것이 맞습니까?”

학생은 그렇다고 자신 있게 답했다. 러셀은 다시 한참을 생각하다가 이렇게 답했다.

참 좋은 질문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나는 그 질문에 답 할 능력이 없습니다.”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모든 학자들이 이러한 상황과 마주했을 때 이처럼 정직하게 대답할 수 있을까? 아마 모르긴 해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러셀이 이렇게 정직한 대답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학문적 지식에 대한 나름의 자신감에서 나온 용기와 겸손의 표현일 것이다. 또한 세계적 석학으로 평판을 받고 노벨문학상을 받게 된 것도 교만하지 않고 자신을 속이지 않는 정직한 학자이기에 가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고, 잘못을 했으면 솔직하게 인정하고, 진심어린 사과와 함께 용서를 구함이 바로 정직이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 둘러대고 스스로 잘못을 알면서도 시인하지 않고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은 거짓의 최상급이다. 그러니 용기 없는 사람은 정직하기도 힘들다.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이 중국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지인의 어린 자녀에게 약속을 했다. 며칠 뒤 아이의 생일날에 인형을 사오겠다고. 그러나 그 무렵엔 안창호 선생을 체포하기 위해 일본 경찰의 감시가 매우 심했던 때였다. 그럼에도 선생은 아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위험을 무릎서고 인형을 사서 아이에게 갔다가 그 날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훗날 선생은 어린아이와의 약속도 약속이므로 반드시 지켜야 했다.”고 말했다. 그 누구와의 약속이든 스스로 한 약속은 꼭 지킨다는 굳은 신념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약속을 하면서 지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거나 꼭 지키겠다는 확신 없이 하는 것은 거짓이나 위선에 가깝다. 그러니 자기가 한 말이나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 또한 사실인지 책임회피용인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은 편하게 생각하고 편하게 행동하며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걸 탓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상호관계를 생각하지 않는 편리 추구는 자기중심사고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편하게 생각하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낙천적 삶의 태도라고 긍정평가하기도 한다. 그래서 약속을 하는 것도 약속을 어기는 것도 너무 쉽게 결정한다. 조금 더 마음이 다른 쪽으로 기울거나 도움이 될 일이 생기면 주저 없이 선약(先約)을 버리고 후약(後約)으로 갈아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의 잦은 반복과 묵시적 인정은 정직하지 못한 사람, 믿을 수 없는 사람을 양산하고 넓게는 사회적 규범과 질서를 해치는 나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우리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칭한다. 반면 때와 장소에 따라 말을 자주 바꾸는 사람은 신뢰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을 정직하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상황에 따라 수시로 자신의 입장을 바꾸어 합리화 하는 사람은 자신의 거짓행위를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습관이 몸에 베여있어 참으로 함께하기 불편한 사람이기도 하다. 여기서의 약속은 보통사람들의 개인적 약속도 포함되지만 넓게는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대중과의 약속도 포함된다. 정직한 사람은 자신의 유·불리 때문에 스스로의 신념이나 약속을 번복하지 않는다.

지난해 늦은 가을. 꼭 이맘때 친구 집 뒷산에서 작은 단풍나무 한 그루를 가져왔다. 여러 가지 색깔의 단풍나무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아주 밝고 선명한 감 홍시 색깔의 단풍을 선택했다. 그 나무를 보는 순간 단풍잎의 색깔이 너무 선명해서 우리 집 정원으로 옮겨놓아도 내년 가을에 똑같은 색깔의 단풍을 볼 수 있겠다는 믿음과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여름부터 내내 궁금했다. 어떤 색깔의 단풍이 될까? 단풍나무는 토질에 따라 색깔이 바뀔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아서 더 궁금했다. 그런데 내 뜰의 단풍나무는 정말 정직했고 나의 믿음을 외면하지 않았다. 작년 이맘때 그 곳에서의 색깔과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똑같은 색깔의 선명하고 아름다운 잎을 달고 가을 햇살에 반짝이며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침묵의 약속을 지켜준 내 작은 단풍나무에게 감사와 깊은 믿음의 마음을 보낸다. 먼 훗날에 큰 나무로 성장해서도 변하지 말고 지금처럼 아름다운 색깔을 그대로 지켜달라고 부탁도 해 본다.

늦가을 들판에 나가보라 한여름의 푸름도 황금빛의 화려한 옷도 다 벗어버리고 맨몸으로 쌀쌀한 바람을 맞고 있다. 오색 단풍과 맑은 계곡물이 아름답지만 숨김없이 정직하게 자신을 드러낸 황량한 벌판의 시원한 바람은 어떠랴. 파란 하늘과 맞닿아 있는 저 멀리 벌판 끝의 산등성이 넘어가는 만추의 붉은 노을은 또 어떠랴.

해질 무렵 들판을 한 바퀴 돌고 오면 낮 동안 내내 채우지 못해 씨름하던 한 줄의 문장이 딱 떠오른다. 정직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정상진/前밀양초등학교 교장)

 

정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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