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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憐愍)

[2020-04-06 오전 9:58:58]
 
 
 

봄비가 내린 다음 날 오후에 가까운 저수지를 찾았다. 따뜻한 볕을 등지고 천천히 걸었다. 청보리밭 두렁 아래 달맞이꽃이 새 잎을 키우고 있었다. 스스로 번식한 듯 빼곡하게 자리 잡고 있어 몇 포기 솎아내도 될 것 같았다. 나는 호미도 꽃삽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제 비가 왔고 땅이 젖어 있으니 그냥 뽑아보기로 하였다. 겉흙을 잘 걷어내고 뿌리 위쪽을 잡고 살며시 당겨보았다. 쉽지 않았다. 포기할까 하다가 조금 더 힘을 주어 당겼다. 이를 어쩌나! 뿌리가 소리를 내며 끊어져버렸다. 연약한 줄기와 연두 빛 잎사귀들만 내 손에 들려 있었다. 마음이 아팠다. 겨우내 땅속에서 견디다가 새로운 삶을 위해 고개를 내민 어린 생명을 뺏었으니.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다음 날 호미와 삽을 가져와서 안전하게 옮겨올 수 있었을 것을.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무언가를 판단하고 선택하고 결정해야 한다. 열 살의 어린이에게는 그 나름의 문제들이 있을 것이고 팔십 노인에게는 또 나름대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문제들이 있을 것이다. 삶의 무게는 제각기 다르겠지만 개인의 생각과 기준에 의해 살아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더러는 가볍고 하찮은 일로 생각되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상처와 슬픔을 안겨 줄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생명과 관련된 일일 때는 더욱 그렇다. 모든 생명은 존귀하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마찬가지다. 생명의 소중함과 타인의 아픔을 늘 생각하는 사람들이 사는 사회만이 희망이 있다. 여기에는 연민(憐愍)이라는 인간의 선한 본성이 깊이 관련돼 있다.

창녕 남지의 개비리길은 남지읍 용산리에서 신전리까지 6.4km를 걷게 된다. 그 길의 일부는 수십m 아래의 낙동강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절벽위의 오솔길이다. 걷다 보면 이 길의 유래에 대한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영아지 마을 황 씨 집의 개가 새끼 11마리를 낳았는데 젖이 10개 밖에 없었다. 새끼들 중에 한 마리가 유독 눈에 띄게 조그만 조리쟁이(못나고 작아 볼품이 없다는 뜻의 지방 사투리)였다. 이 조리쟁이는 항상 경쟁에서 밀려 어미젖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황 씨는 10마리의 강아지는 모두 남지 장날에 내다 팔고 조리쟁이 한 마리만 누렁이(어미 개)곁에 남겨 두었다. 어느 날 산 너머 알개실 마을로 시집간 황 씨의 딸이 친정에 들렀다 가면서 조리쟁이를 키우겠다고 데려갔다. 며칠 후 황 씨의 딸은 깜짝 놀랐다. 친정집의 누렁이가 와서 조리쟁이에게 젖을 먹이고 가는 것이었다. 폭설이 내리는 겨울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누렁이는 알개실 마을에 와서 새끼에게 젖을 먹이고 갔다. 한 겨울 눈길에 이 먼 곳까지 어떻게 오고 가는지 뒤를 쫓아 보았다. 누렁이는 급경사로 인해 눈이 쌓이지 않는 낙동강 절벽위의 위험하고 좁은 길을 따라 날마다 오갔던 것이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개(누렁이)가 다닌 비리(벼랑·절벽)위의 길이라고 해서 개비리길이라 불렀던 것이다. 나는 개비리길의 유래를 읽고, 그 길을 걸으면서 연민에 대해 한참 동안 생각해보았다.

씀바귀는 작지만 대충 꽃을 피우지 않는다. 한 송이의 꽃을 피우기 위해 지독한 고통을 참고 견딘다.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려 물을 자아올리고 한낮에는 햇빛에 온 몸을 내주며 아직은 밤공기가 차가운 이른 봄에는 별빛으로 온 몸을 감싼다. 사람에게는 한 송이 작은 꽃을 피우는 것이 하찮은 일일지 몰라도 씀바귀에게는 천지가 진동할 큰 사건인 것이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무인(武人)으로 여러 차례 전장(戰場)을 다니면서 더러는 직접 적의 목숨을 거두기도 하였을 것이고 수없이 많은 사람의 죽음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건국의 과정에서도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했다. 그런 그의 돌덩이 같은 가슴을 녹인 것은 칼이나 창이 아니라 들꽃, 바로 씀바귀 한 송이었다. 어느 날 궁 밖을 산책하던 이성계가 걸음을 멈추고 논두렁 아래를 한참 쳐다보고 있었다. 노란 씀바귀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전하, 캐어다가 화원에다 심어놓을까요?” 신하의 물음에 왕은 고개를 저었다. “저렇게 예쁜 꽃을 우리만 보아서 되겠느냐. 촌부들이 모두 볼 수 있게 두었다가 가을에 꽃씨를 받아서 화원에 뿌리자꾸나늦게나마 그의 가슴에도 연민이 싹트기 시작 했을까.

조선시대 중앙의 사대부나 다수의 지방 수령들은 풀뿌리로도 연명하기 어려운 불쌍한 이 땅의 무지렁이 백성들에게 기름을 짜듯 잔인하게 모든 것을 추렴해 갔다. 그들이 무식해서, 사람이 해야 할 도리를 몰라서 그랬겠는가. 그들은 출생부터 먹을 것을 타고나서 가난을 경험 해보지 않았다. 그래서 가난의 서러움과 고통을 보고도 가슴 아파할 줄 몰랐다. 그들은 모두 글을 읽어 유식했고 과거에 급제하여 출세하였으나 연민이란 따뜻한 가슴이 없었다. 그들이 명분과 당쟁에 빠져 긴 시간을 허송하면서 대비하지 못해 겪게 된 전쟁으로 죽어 간 백성은 또 얼마나 많았는가. 한 사람의 생명은 이 우주와도 바꿀 수 없으며 그 소중함의 정도는 누구에게나 똑 같아야 한다는 것을 그들이 정말 몰랐을까? 위정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측은지심(惻隱之心)인데. 그들이 그토록 소중하게 떠받들었던 학문이나 이론은 참으로 위선적이고 이기적이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예방 백신도 없는 새로운 바이러스가 찾아와 온 나라가 공포의 도가니에 휩싸여 있다. 모두가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기이다. 그래도 이 또한 지나갈 것이며 올해도 봄은 어김없이 온갖 꽃들을 활짝 피울 것이다. 마스크 두 장을 사기위해 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모두의 가슴에 희망을 간직하자. 사월은 천지에 활기찬 생명의 등불을 밝혀 줄 것이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희망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정상진/前밀양초등학교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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