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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마을(1)

[2020-05-15 오전 11:15:25]
 
 
 

3장 우국(憂國)의 밤

 

안개 마을(1)

 

날이 저물면서 동산리 일대엔 천지 분간을 못할 정도로 밤안개가 짙게 깔려 있었다. 예로부터 운막향(雲幕鄕) 또는 운포향(雲布鄕)으로 불릴 만큼 사시사철 운무가 잦은 곳이라 드물게 보는 광경은 아니었다.

더욱이 지금처럼 응천강의 유량이 늘어나는 하절기가 시작되면 사흘이 멀다 하고 조석으로 이렇게 쌀뜨물 같은 물안개가 천지를 뒤덮기 일쑤였고, 문중 종산인 동산(東山)을 배산으로 하고 동향으로 자리 잡은 종가를 중심으로 무수한 기와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여흥 민씨네의 동산리 집성촌은 운무로 뒤덮인 태산준령의 영봉들처럼 무수한 기와지붕의 용마루들이 올망졸망 키를 다투며 안개가 만들어내는 순백의 장막 위로 아슴하게 고개를 내밀기 마련이었다.

이렇게 순백의 운무가 온 세상을 장엄하게 뒤덮을 때마다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내면에서도 태초의 천지개벽과도 같은 이변 현상이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생활 속에서 분출된 온갖 욕망과 흑심들은 시야 가득 실려 오는 순백의 안개 속에서 순수한 본연의 모습으로 깨끗이 정화되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길마저도 천상의 세계를 대하는 듯 한결같은 고결함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 안개 속에는 순리와 순수를 지향하는 하늘의 뜻이 담긴 습한 포자들이 은밀하게 서식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낱 미세한 수분의 집합체에 불과한 안개가 이처럼 천심과도 같은 무소불위의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경이로운 경험을 일상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은 이곳 사람들만이 누리는 자연의 특별한 혜택인 동시에 천심을 생각하면서 하늘에 대한 두려움을 곱씹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오늘의 중산에게는 그런 혜택을 누릴 겨를이 없었다. 황포돛배를 타고 오는 동안 중산의 가슴 속에서 들끓던 여러 가지 잡다한 감정들은 안개 속으로 접어들면서 다소 진정되는 듯하였으나, 감내에서 겪었던 별난 체험의 잔상은 광복단 사건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여전히 복잡한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휘젓고 있었다. 게다가, 청관 스님의 문제와 임오군란에 대한 여러 가지 수수께끼까지 첨예한 관심사로 떠오르면서 그의 마음은 더욱 혼란스럽기만 하였다.

그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오늘도 집 앞의 바깥마당에서는 난전의 국밥집처럼 일렬로 내걸린 가마솥마다 허연 김을 내뿜으며 국과 밥이 끓고 있었으며, 사방에 펼쳐진 멍석마다 배급 받은 국밥으로 주린 배를 채우는 빈민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차례를 기다리는 굶주린 걸객들의 행렬은 긴다리강의 목교가 바라다 보이는 바깥마당 밖의 행길까지 길게 꼬리를 늘이고 있었다.

그 모양을 보고 말에서 내린 중산은 김 서방에게 말고삐를 건네고는 그때까지 배식 작업에 여념이 없는 남녀종들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가 마당을 휘젓고 다니며 급식 작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던 청지기 서 서방을 발견하고 그를 불러 세운다.

서 서방! 오늘 따라 배식이 왜 이리도 늦은 겐가?”

서 방님, 이제 오셨습니껴? 이럴 줄 알고 저녁 일찍부터 서둘렀지만, 오늘이 단오절이라 돼지 국밥을 준다는 소문이 퍼지는 바람에 급식을 해도 해도 끝이 없습니더!”

서 서방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목에 걸친 광목 수건으로 이마에 내맺힌 땀을 닦으면서 머리를 절래절래 흔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더 일찍부터 서두르지 그랬나?”

그야 물론 그렇게 했습지요! 그렇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더. 고깃국을 얻어 묵을라꼬 멀쩡한 사람들까지 저렇게 날이 어둡기를 기다렸다가 화적 떼처럼 몰려오는 바람에 여태까지 이러고 있는 기이 앙이 겠습니껴?”

아니, 사람들이 날이 어둡기를 기다리다니 그건 무슨 말인가?”

문딩이하고 걸뱅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구휼미를 받았던 절량농가에다 집에 양식이 있는 멀쩡한 마을 농사꾼들까지 고깃국을 얻어 묵을라꼬 저마다 앞 다투어 아이들 손에 커다란 바가지를 들려 가지고 내보낸 기이 앙이겠습니껴! 베룩이한테도 낯짝이 있다고, 지들도 남세시럽었던 모양지요.”

서 서방은 이마의 땀을 연신 닦으며 볼멘소리를 한다. 남녀종들은 물론 명절 휴가로 일손을 놓은 머슴들까지 동원하여 끝도 없이 밀려드는 사람들에게 급식을 하다 보니 거의 녹초가 다 될 지경인 모양이었다.

듣고 보니 딴은 그럴 수도 있었겠구먼!”

그럴 수 있다뿐이겠습니껴? 사흘을 굶으면 남의 집 담장을 안 넘을 장사가 없다꼬 하는데, 그래도 남의 눈을 생각할 정도로 여유가 있는 걸 보면 아직도 피눈물 나는 배고픔을 겪어 보지 못한 기이라예!”

그래도 오죽했으면 염치 불구하고 저렇게 아이들을 있는 대로 다 내보냈겠는가?”

기근이 들 때마다 원근의 소작농과 마을 빈민들에게 구휼미를 나누어 주는 일은 미리 대상을 정해 놓고 하기 때문에 그런 일은 없었지만, 유리걸식하며 떠돌아다니는 문둥병 환자와 거지들을 대상으로 하는 급식 작업은 그런 절차가 없으니 그야말로 얻어먹는 사람들의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다.

이 보게, 서 서방! 그래도 오늘이 명절이니 먹는 밥에 인색해서야 되겠는가? 다소 힘이 들더라도 기왕에 불쌍한 사람들을 돕자고 하는 일이니, 밥을 못 먹고 돌아가는 이가 한 사람도 없도록 유념하여 각별히 보살피도록 하게!”

 

정대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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