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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마을(4)

[2020-06-29 오전 11:00:28]
 
 
 

3장 우국(憂國)의 밤

 

안개 마을(4)

 

중산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이다가 방금 전해 올린 서찰과 깊은 관련이 있을 듯하여 용기를 내어 양춘재에서 만났던 낯선 노선비의 얘기를 조심스럽게 입에 담는다.

오늘 불공을 마치고 처가에 들렀을 때, 안사랑 양춘재에 웬 귀한 손 님 한 분이 와 계셨습니다. 호암 선생이라고, 경북 의성에서 오신 분이 라고 들었습니다!”

중산은 그 얘기마저도 부친이 동석한 자리에서 발설해도 되는 것인지를 몰라 조심스럽게 운을 떼고는 두 윗분들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반응을 살핀다.

호암 선생이라는 바람에 용화 부인은 옆에 앉은 영동 어른을 향하여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떡이더니,

그분 역시도 우리 일을 돕고 있는 의성의 네 진외가 집안의 어른이시니라!”

그러시다면 그분도 성내 헌병대 감옥에서 고초를 겪고 계신 남포 선생님과 함께 항일 독립운동에 동참하고 계신 분이란 말씀이십니까?”

어허, 그 무슨 신중치 못한 경망스러운 말버릇이냐! 우리 문중의 존폐가 걸린 막중지대사를 가지고 종손 같잖게.”

중산이 항일 독립운동이라는 말을 함부로 입에 담자 그때까지 그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던 영동 어른이 펄쩍 뛸 듯이 놀라며 엄하게 질책을 한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한테 나라를 되찾아 왕조를 복원하는 일만큼 지중하고 화급한 문제는 없느니라! 허나, 그것이 문중의 명운이 걸린 막중지대사이니 위험천만한 그런 밀사(密事)를 거론할 때에는 혈육 간에도 직설을 엄중 삼가는 것이 종손인 네가 지켜야 할 수신제가의 근본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앞으로는 그 사실을 명심하고 말과 행동에 각별히 조심하고 신중에 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니라.”

장성한 종손이 제 아비로부터 심히 질책을 받는 게 보기가 딱했던지, 잠자코 듣고만 있던 용화 부인이 대신 안존한 목소리로 마음 상하지 않게 중산을 타이르며 입단속을 한다.

앞으로 할머님과 아버님의 말씀을 금과옥조로 삼고 윗분들께 심려를 끼치지 않도록 언행에 각별히 신중을 기하며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중산은 머리를 조아리며 지체 없이 사죄를 한다. 어려서부터 오우 선생의 효우(孝友)를 배워 가슴 깊이 새기고 성장한 중산에게는 그러한 가풍을 지키고 윗분들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것이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겨야 할 생활수칙이었다.

그리고 또 차후로는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행동할 것이며, 또한 알려고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라!”

거듭되는 부친의 엄중한 경고에 용화 부인이 다시 첨언을 한다.

사흘이 멀다 하고 남들이 보기에 서원 순례에다 명산대천을 찾아 팔도 유람을 하고 다니는 듯이 소일하고 있는 네 아비를 보면 너에게도 달리 느껴지는 바가 있을 것이니라.”

더구나 너는 장차 우리 문중을 이끌어 갈 막중한 책임이 있는 종손이 아니더냐? 너의 모든 언행이 장차 우리 문중의 명운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만사를 행함에 있어 신중을 기하고 조심에 또 조심을 해야 할 것이야!”

용화 할머니와 부친의 거듭 되는 다짐에 아뢰고 싶은 바가 많았던 중산은 그만 몸도 마음도 바윗돌처럼 뻣뻣하게 굳어지고 만다.

여기서 오늘 겪은 일들에 대해서 더 이상 입을 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두 분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대단한 불효가 될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확신이 서자 중산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그대로 자리에서 조심조심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큰절을 올리고 뒷걸음질로 물러나는 아들을 바라보면서 영동 어른은 자식을 잘못 가르쳐서 모친께 대단한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찼고, 용화 부인은 그런 영동 어른의 행동마저도 눈에 거슬렸던지 자못 언짢은 얼굴로 길게 한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간 중산의 기척이 멀리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자탄가처럼 신음소리를 토해내는 것이었다.

, 이런 것이 바로 신중치 못한 자의 자업자득이로고! 아비인 자네가 불같은 의분을 참지 못하고 위정척사 세력의 의병부대에 들어간 구한국 군인들과 사단을 벌이는 바가 있었으니, 누구보다도 사려 깊은 중산이 젊은 의기를 참지 못하고 저러는 것도 부전자전으로 다 자네의 탓이 아니겠는가?”

, 어머님!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어머님께 돌이킬 수 없는 크나큰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는데, 소자가 어찌 그걸 모르겠습니까? 그래서 엎질러놓은 물을 되 담는 심정으로 이렇게 늘 속앓이를 하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영동 어른은 회한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토로하고는 하늘에 대고 고해성사라도 하는 듯이 두 눈을 지그시 내리감는다.

이날 밤 용화당에서는 왕조복원이라는 가문의 명운이 걸린 현실의 타개책을 숙의하느라고 밤이 이슥하도록 불이 꺼지질 않았다.

그리고 비밀의 장막처럼 드리워진 바깥의 안개 또한 그날 밤 내내 걷히질 않고 있었다.

박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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