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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황(女皇)의 행차-2

[2021-06-25 오후 4:03:35]
 
 
 

4장 운막향(雲幕鄕)의 후예들

여황(女皇)의 행차-2

 

그런데 따로 사찰 음식을 마련하여 별도의 용무를 보실 의향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좀처럼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젊은 자기를 배제시키고 집안일에 손을 놓은 지가 오래인 부친을 대동한다는 사실 또한 예사롭지가 않은 것이다.

할아버지의 핏줄이라는 청관 스님이 지금 표충사 절에서 승려 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와 관련된 일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장인어른의 얘기로는 자기의 사승(師僧)을 따라 표충사를 떠나간 뒤로 동래(東萊) 범어사(梵魚寺)에 승적(僧籍)을 두고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사명대사가 입적했다는 합천 해인사를 비롯하여 오대산 월정사와 백담사와 같은 전국의 유명 사찰들을 돌면서 수행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종적을 찾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 덧붙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따로 마련한 사찰 음식은 어디에 쓰시려는 것일까. 표충사 경내에 있다는 영정학교(靈井學校)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려는 것일까. 그런데 이번의 불공 행차 길에 용화 할머니께서 따로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중산은 한 나절 내내 그 생각에 젖어 있었다. 장꾼들이 도구늪들 앞의 돌티미 나루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차와 소달구지에 장에서 구입한 물품들을 잔뜩 싣고 돌아온 것은 기나긴 오월의 하루해가 저물어 서산마루에 걸려 있을 무렵이었다. 물에 불린 떡쌀을 뒤꼍의 디딜방앗간에서 빻고 콩고물을 만드는 한 편으로, 전 부칠 재료로 쓸 야채들을 씻어서 물기를 빼고, 사찰 반찬거리의 주재료인 연뿌리와 우엉 껍질을 벗기는 등, 집에서 미리 해두어야 할 준비는 이미 끝나 있던 상태라,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대대적인 불공 준비로 온 집안이 상하 없이 떠들썩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안채에서는 양동 댁의 진두지휘 하에 절간에 시주할 공양물들이 품목별로 고리짝에 담겨서 속속 묶여지고, 아궁이마다 불이 지펴진 부엌에서는 부처님 전에 올릴 시루떡, 백설기며 약식 같은 음식물들을 안친 솥에서 허연 김들이 아침부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행랑채 마당에서는 머슴들이 치는 떡메 소리가 요란하였고, 부엌 앞 축대 밑에서는 따로 내다 건 솥뚜껑 가에 둘러앉은 하녀들이 파, 마늘과 같은 사찰의 금기 식재료가 들어가지 않은 각종 전붙이 지짐을 굽느라고 야단법석들이었다.

거기에다 향촉을 비롯한 각종 불공 용품들이 별도로 묶여지고, 도중에 남의 집을 빌려 숙식을 하게 될 경우를 대비하여 거기에 따른 주·부식물과 밑반찬은 또 그대로 따로 묶어 준비해야 했으므로, 격장 토담 너머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하루 내내 일꾼들의 분주한 발자국 소리와 떠드는 소리가 잠시도 끊이질 않고 있었다.

그리고 뒤꼍 고방 앞에서는 한 무리의 하인과 머슴들이 그들대로 시주미로 싣고 갈 쌀의 티와 돌을 골라내고 가마니에 넣어 묶느라 부산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웃전들이 타고 갈 가마와 말안장을 손질해야 했고, 말의 편자도 갈아 박아야 했고, 짐을 싣고 갈 우마차들의 바퀴를 갈아 다는 것은 물론, 가마꾼들이 신고 갈 여벌의 짚신과 멜빵도 넉넉히 장만하는 등, 용화 부인을 수행할 하인과 머슴들이 챙기고 준비해야 할 것들 또한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에 초량 미곡창에 내려가 있던 재무담당 김 서기가 용화당을 급히 다녀가는 것으로 보아 모종의 준비가 별도로 이루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온 집안이 이렇게 부산스러운 속에서 중산은 집 안팎을 둘러보면서 불공 떠날 준비 상태를 일일이 점검하느라고 혼이 모두 빠져 달아날 지경이었다.

의병운동이나 항일 독립운동 지원과 관련된 일인가 내심 긴장을 했는데, 난데없는 불공이라니!’

그런 와중에도 이따금씩 이런 미혹한 생각과 함께 걷잡을 수 없는 당혹감이 불쑥불쑥 떠오르는 데는 용화 할머니의 뜻을 하늘같이 존중하는 중산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무슨 사정이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중산은 용화 할머니가 불공을 마치고 돌아오면 저절로 알게 될 일이라며 내심 마음을 다잡고는 온 집안을 휘젓고 다니면서 할머니의 불공 준비에 아무 차질이 없도록 만전을 기하였다.

드디어 불공을 드리러 떠나는 날 아침이 밝아 왔다. 이른 아침부터 짐을 잔뜩 실은 여러 대의 우마차가 솟을대문 밖에 등대하였고, 용화 부인이 타고 갈 가마와 영동 어른이 타고 갈 말도 대령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마를 메고 갈 가마꾼에다, 중도에 그들과 교대할 예비 가마꾼이며, 용화 부인을 수행하며 모실 김 영감과 교전비에다 침모며 찬모를 비롯하여 영동 어른을 안내할 길잡이에다, 우마차를 끌고 갈 인부 등 등, 솟을대문 앞의 바깥마당으로 속속 모여드는 인원수만도 수십 명은 족히 될 성싶었다.

상전들이 거동하기를 기다리며 길 떠날 준비를 하고 있던 수행 하인과 머슴들은 자기의 처지에 따라 이런저런 심사를 드러내며 저들끼리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가마를 메고 왕복 이백 리나 되는 먼 길을 터벅거리고 가자면 두 어깨가 남아날는지 모르겠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종가의 오랜 가마꾼 오 서방이 허리춤의 곰방대를 뽑아 등을 긁다 말고 굳은살이 박힌 어깨를 주물러 보면서 볼멘소리를 한다.

예전에 부친상을 당하여 멀리 의성에 있는 친정을 다녀올 때 어깨의 살가죽이 벗겨져서 피를 흘리는 가마꾼들을 위하여 용화 부인이 스스로 가마에서 내려 가지고 산고개를 직접 걸어서 넘었다는 옛 일화가 전설처럼 전해 오고 있었지만, 노구의 그녀를 모시고 가는 이번 행차에서는 그런 요행도 기대해 볼 수 없는 처지인 것이다.

그래도 용화당 큰 마님 덕분에 복에도 없던 표충사 큰절을 귀경하게 생겼으니 이런 횡재가 어디 또 있겠노? 표충사라 카모 옛날에 왜놈들이 전쟁을 일으켰을 때 온갖 도술을 부려 가지고 쪽발이 놈들이 말만 들어도 벌벌 떨게 만들었다는 그 유명한 사명대사의 사당이 있다는 유명한 큰절 앙이가?”

 

정대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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