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비는 추억이 되고
 
 [2021-09-10 오후 4:08:42]

일찍 잠든 탓에 이미 옅어져버린 새벽잠 사이로 비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파트 임에도 불구하고 사작사작 내리는 소리와, 치적치적 땅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까지 들리는 걸 보면, 제법 많이 오는 비이거나 아니면 소음이 아직 깨어나지 않은 새벽이어서 일 것이다.

명료하지 않은 의식과 따뜻한 잠자리가 주는 안온함 속에서 한동안 그 소리를 듣는다. 좋다.

어린 눈에는 신기함으로 보이던 비는, 자라면서 그리움이 되고, 애틋함이 되고, 사랑이 되고, 이별이 되었다가, 어른이 되면 생활에 도움을 주는 것 또는 방해를 하는 것으로 구분되거나, 술자리에서 술 맛을 더해주는 자연현상으로 바뀌어 간다. 비가 변했을까? 아니 변한 건 스쳐 지나간 시간의 두께 만큼 덧칠해져 무뎌진 감성일 것이다.

비가 오면…… 귀찮다.

우중충한 하늘과 습기의 무게, 우산에게 한 손을 빼앗기는 불편함, 차 문을 열고 우산을 접는 짧은 순간의 빗방울, 조심스러운 발걸음과 바짓단 사이로 스미는 물기 등으로.

그러나 비 내리는 거리에서 그대 모습 생각해빗방울 떨어지는 그 거리에 서서로 시작되는 비를 소재로 한 노래를 좋아하고, 잎사귀에 타닥타닥 내려앉는 빗방울을 바라보거나, 사작이는 빗소리를 들으며 멍 때리는 것이 좋은 걸 보면 비를 좋아하는 것일 게다.

먼 옛날의 빗소리를 찾아 가본다. 하늘은 잿빛으로 가라앉아 있고, 낮인데도 밤 같은 어두움과 굵은 빗소리만 가득한 날. 키 작은 방문과 흙벽의 아늑함이 있는 작은 방이다.

나보다 조금 더 큰 누나의 진행(?)에 따라 몇몇 조무래기들이 돌아가며 노래를 한다. 심사위원은 당연히 조금 더 큰 누나의 몫이고. 까마득히 세월이 흐른 후, 그 작은 방에 있었던 아이들의 얼굴은 희미한데, 열어둔 방문 사이로 보이던 작은 마루와 작은 마당에 떨어지던 빗소리는 아직도 희미하지 않은 기억이다.

어린 기억의 빗소리가 아닌, 중년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빗소리도 있다. 6개월의 연수 기간이 있었다. 직장생활 중 연수의 기회는 휴식의 느낌도 있고, 재충전의 느낌도 있고, 자유로움의 느낌도 있다.

따라서 이 경우 대부분은 주공야음(낮에는 공부 하고, 밤에는 음주를 하는)을 하게 되는데, 어느 비 오는 날 저녁. 주공은 했으니 야음을 하려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눈으로 차분하게 자리 잡은 기와집 한 채가 들어왔다.

전통주와 홍어, 전 등을 파는 가게였는데, 자리 잡은 곳은 한지 바른 문을 열고 들어가면, 맞은편 벽의 아랫부분에 작은 봉창이 하나 나있는 방이었다. 열린 봉창의 크기만큼만 보이던 빗방울과 흙바닥을 패던 처마 끝의 낙숫물 소리가 그날의 주인공이었는데, 꽤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비만 오면 생각나는 광경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어떤 비는 추억으로 남았고,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도 어떤 비는 내릴 것이다. 그 비가 얌전히 내려앉는 봄비여도, 우당탕탕 사나운 여름날의 세찬 비라도, 조금은 청승스러운 가을비여도, 을씨년스럽고 차가운 겨울의 비일지라도 비 오는 날이 싫지 않았으면 좋겠다. 비 오는 날 역시 내가 살아내야 할 시간이므로.

맑은 날은 맑은 날대로, 흐린 날은 흐린 날대로, 비 오는 날은 비 오는 날대로 보듬어 살아가는 것. 산다는 건, 살아간다는 건.

 

김종열/농협 밀양시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