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 그리고 뜬금없는 대추 한 알
 
 [2021-10-12 오후 4:16:17]

시장에 다녀온 아내의 장바구니 사이로 노오란 봉우리가 보인다.

나도 이제 나이를 먹었는가 보다 어쩌고 하면서 국화 화분 하나를 내려놓는다.

잘 사온 듯하다. 거실에서 가장 잘 보이는 베란다의 중앙에 화분을 놓았다. 가을 햇살이 국화꽃을 피우는 것을 지켜볼 심산이다.

홀로 집에 남겨진 시간, 커피 한 잔을 마련하고 국화가 마주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예전에 무드라고는 약에 쓸려도 없는 지인이, 꽃 선물 한 번 하지 않는다는 아내의 지청구에, 결혼기념일 날 국화꽃 한 다발을 사들고 갔다가 장례식이냐며 더 큰 잔소리를 만났다는 얘기가 생각나서 피식 한 번 웃는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생전의 아버지는 중년일 때부터 국화를 키웠었다. 허름한 시골 농가의 한 켠에 제법 많은 국화 화분이 있었는데, 주로 흰색과 노란색의 동그란 꽃이었고 가끔은 털북숭이처럼 생긴 꽃도 있었다.

꽃을 피우기 전에는 잎사귀가 쑥이랑 비슷하여 저걸 뭐 하러 키우지?’ 싶다가, 가을이면 어김없이 피는 크고 작은 꽃송이를 스쳐 지나가며 꽃은 예쁘네.’정도의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그랬던 국화꽃을 지금은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아내 말처럼 나도 이제 나이를 먹었구나 싶다.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중학교 때인가? 고등학교 때던가? 교과서에 실렸던 국화 옆에서라는 시가 떠오른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라는 첫 소절과,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라는 구절이 아직도 잊히지 않고 있다. 시험에 많이 출제 됐었던가?

또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뜬금없이 대추 한 알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이건 시험에 출제된 것도 아닌데

가을의 국화꽃에 담긴 봄날의 소쩍새 울음을 듣는 붉은 대추 한 알에 숨어있는 태풍과 천둥을 찾아내는 시인의 혜안이 놀랍고 부럽다.

또 또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이제 이런저런 생각 없이 국화만 보며 멍 때리자고 마음먹는다. 멍 때리면 심신이 안정되고 머리가 맑아진다고 하지 않는가. ……멍 때리기도 쉽지 않다. 움직임이 없는 응시 대상이어서 그런 건가? 불멍(불을 보며 멍 때리는)과 비멍(비를 보며 멍)은 쉬웠는데

불은 똑 같은 모습인 듯 한데 한 순간도 같은 모양일 때가 없다. 비 역시 마찬가지이다. 빗방울의 굵기가 다르고 떨어지는 위치도 그 때 그 때 다르다.

그래서 불멍이나 비멍을 하는가 보다. 그런데 가만, 국화가 움직임이 없었던가? 작은 꽃망울이 저렇게 활짝 피었는데, 보이는 움직임과 보이지 않는 움직임의 차이 일려나.

커피 잔에 남은 마지막 한 모금을 홀짝 마신다. 며칠 후면 국화꽃은 시들어 버릴 것이고, 뜬금없이 생각난 대추 한 알도 단맛을 머금으며 시들어갈 것이며, 가을은 깊어가다 그 뾰족한 끝으로 겨울의 문을 두들일 것이다.

그리고 봄의 소쩍새는 또 울 테고, 여름날의 천둥도 또 찾아 올 것이며, 또 또 국화꽃이 피고, 또 또 뜬금없이 대추 한 알이 생각날 테지.

 

김종열/농협 밀양시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