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산김원봉장군(귀국, 국내활동)
 
 [2005-03-16]

 부인 박차정을 사별한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 약산 김원봉은 1945년 1월 김구 주석의 주례로 민혁당 중앙감찰위원장이었던 우강 최석순의 맏딸 동선(東仙:일명,東玉)과 결혼하여 년말에 아들 중근(重根)을 낳았다.
 

 1945년 5월 8일에 독일이 연합국에 항복하고 7월 26일부터 베르린 교외 포츠담에서는 미대통령 투루먼, 영국수상 처칠, 소련수상 스탈린이 모여 일본의 군국주의를 구축하고, 새로운 질서를 건설하기까지 연합국이 일본을 점령하되 일본의 영토를 규슈(九州), 혼슈(本州), 시코쿠(四國), 홋가이도(北海島)등 4개 섬으로 한정하며 전범을 처벌하고 민주주의를 부활·강화하며, 재군비를 금지한다는 소위 포츠담선언을 발표함으로서 조선의 독립은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즉각 거부하였지만 8월6일에 히로시마(廣島), 8월 9일에 나가사끼(長埼)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같은 날인 9일 만주와 조선으로 소련군이 진격하여 100만의 관동군과 재북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키자 더 이상 버티지를 못하고 8월 15일에 쇼와(昭和)천황의 항복연설을 마지막으로 조선민족은 일본으로부터 마침내 해방되었다.
 

그러나 일제를 우리의 힘으로 굴복시키지 못하고 연합국의 힘을 빌려 해방이 되었으니 약산의 가슴에는 견디기 어려운 감회가 덮쳐왔다. 더구나 이역만리에서 해방된 조국을 생각하며 하루 빨리 귀국하려 해도 그러한 자유조차 없는 지경 이였으니 해방의 기쁨과 감격의 순간도 잠시였을 뿐 오히려 해방된 조국의 미래가 그때부터 걱정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국내에서는 일본이 항복하던 8.15.당일, 일본 총독부의 양해 아래 여운형과 안재홍이 각각 정. 부위원장을 맡은 건국준비위원회(이하 建準)가 결성되어 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하기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고 송진우, 김성수, 장덕수 김준연 등 보수 우익세력은 한국민주당(이하 韓民黨)을 창당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연합군을 환영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9월 8일 인천에 상륙한 미군은 곧 군정청을 설치하여 미군정이 남한의 유일한 정부임을 선언하고, 통치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면서 중경에 있던 임정을 인정하지 않음은 물론 좌·우익을 막론하고 어떠한 정치세력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일제 군국주의에 협조한 사람들을 포함한 보수적인 인물들을 고문으로 추대하거나 과거 조선총독부에 근무하던 친일 관공리들을 각종 군정기관에 동원하여 미군정을 보좌하게 함으로서 현재까지도 일제의 잔재를 깨끗이 청산하지 못하게 만드는 단초를 만들고 있었다.
 

 임정의 위상을 둘러싸고 국내에서 논란이 전개되고 있을 즈음, 중경에 머물고 있던 약산은 당면 정책의 수립에 골몰하게 되었다. 중경의 임시정부가 연합국을 비롯한 세계 어느 나라로부터도 승인을 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쪽으로 진주해 온 미군정청으로부터도 인정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인민의 지지를 받는 혁명정권이 되지 못하리라는 예측을 하고는, 앞으로 국내 인민대중의 자유로운 결단과 선택에 일임하여 민주원칙에 입각해 정권을 세우기 위해서는 임정 국무위원회는 총사직하고 임정의 잔무를 처리하는 기구, 즉 「간수내각(看守內閣)」을 설치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임정의 법통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안(案)이였기 때문에 한독당측의 강한 반발로 의정원 회의조차 개최되지 못하고 이 안은 제안 자체로 끝나고 말았다.
 

남한 주둔 미군사령관 하지(J.Hodge)는 중경 임시정부를 인정하질 않았지만 그 요인들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유는 북한에 먼저 진주한 소련군은 조선인들이 자주적으로 건설한 각급 인민위원회를 지지하면서 북조선의 애국자들과 결합하여 정치적으로 안정을 찾아가는 데 비해서 남한에서는 미군이 신뢰하는 인사들일지라도 그들의 친일경력 때문에 민중으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는 데서 오는 정치적 불안정 상황이 지속되기 때문이었다. 이를 극복하는 데는 중경의 임정 그룹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고 이러한 판단의 근거는 임정 봉대를 주장하였던 한민당측의 요청이 많이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미군정은 1945년 10월 12일 임정의 미주 대표였던 이승만을 먼저 귀국시키고, 11월2일 참모회의에서는 중경 임정요인들의 개인자격 입국허용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개인자격으로나마 환국이 결정된 임정요인들은 하는 수 없이 1945년 11월5일 중국 정부가 제공해준 2대의 낡은 비행기로 상해까지는 도착할 수 있었으나 바로 조국으로는 돌아갈 수 가 없었다. 미군들이 보내주도록 되어있던 비행기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약산이 상해에서 머문 기간이 약 한 달간 되는데, 이곳에서 약산은 학병으로 징집되었다가 상해에 머물고 있던 친척인 황용주(黃龍珠: 전, 부산일보주필)를 비롯해서 일본군 소속 조선인 병사 출신인 청년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이 병사들의 대표는 황용주, 장경순(張坰淳: 전, 국회부의장), 민충식(閔忠植: 전, 호주대사) 등 세 명이였고 그들과 약6천명 가량의 한국인 사병들이 상해의 호강대학(?江大學)에 머물고 있었다.
 

처음엔 이들에 대해서 약산의 휘하인 광복군 제1지대에서 이소민(李蘇民)이 나서서 황용주를 지대장으로 임명하고 광복군 제1지대 주호지대(駐?支隊)라 이름 하여 이들에게 의열단의 투쟁을 부각시킴으로써 민족혁명당의 부대로 만들어 가고 있었으나, 사실상 한독당측의 부대인 제2지대가 서안에서 미국의 정보기관인 OSS의 협조로 훈련을 마치고는 바로 지대장 이범석이 이끄는 대원들이 8월 18일 여의도 비행장으로 들어갔으나 일본군들의 저지를 받아 상해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게 되어버리자, 이 주호지대를 찾아갔고, 그때부터 제2지대 대원 이였던 장준하(張俊河)와 김준엽(金俊燁) 등의 노력으로 이 부대는 이후 김구,이청천 등이 상해로 오면서 광복군 사령관 이청천의 사열을 받게 되었고,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약산과는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황용주의 회고에 의하면 약산이 상해에서 머무는 동안 그는 상해의 조선 청년들과 자주 어울렸다고 한다. 청년들을 상해의 명물인 두부찌개 주점으로 데리고 가서 술도 사주고 청년들과 새로운 민족국가 건설과 그 경영 방략에 관해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거나 청년들의 견해를 듣고 많은 토론을 나누기도 했는데, 약산이 대단한 호주가였다고 들 전하고 있다.
 

이곳에서 약산은 밀양 출신으로 정통 사회주의자인 안영달(安永達)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1931년 당시 밀양청년동맹원으로 일제를 타도하고 일제의 만주출병을 저지하기 위하여 동지였던 가곡동 출신 한봉삼(韓鳳三), 산외면 다원 출신 손주헌(孫朱憲) 등과 삐라를 제작하여 살포하는 등 밀양과 대구 등지로 다니며 반전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복역한 사실이 있고, 일본으로 건너가 상지대학에 입학했으나 학병으로 중국 전장에 끌려와 해방을 맞았고 친구인 황용주를 통해서 약산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안영달에 대해서 조금더 살펴보면 그는 국내에 있을 때부터 이미 공산당원이였고, 일본에서도 일본공산당에 가입한 경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상해에서도 조선공산당 조직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는데. 안영달이 약산의 사상에 대해서 정통사회주의자는 아닌 것 같지만 동조자 정도는 될 것으로 보고 자기의 경력, 활동사항, 생각 등을 솔직히 틀어놓으며 프로레타리아 혁명을 주장하였다. “향후 사회주의의 도래가 역사의 필연이고 우리도 그런 철저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강조하고는 특히 약산이 태항산(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팔로군과 함께 활동하였던 곳)을 거쳐 연안으로 가지 않고 남아 있었던 이유에 대하여 비난 섞인 추궁을 가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약산은 황용주와 개인적으로 만나면 “안군은 머리도 영리하고 앞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할텐데, 너무 지나치다. 향후 혁명과제로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민주적인 정부도 만들고, 중요한 산업은 국유화해야 할 것 같으나 한국은 소련과는 사정이 다르고 소지주, 봉급생활자를 포함한 쁘띠부르조아층(中産層)을 혁명운동에서 제외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고 “조선 현지 사정은 잘 모르지만 항상 교조적으로 기계적으로 해서는 안된다”고 비평을 했다고 전하고 있다.
 

임정 요인들이 상해에 머문지 18일 만인 11월 23일 미군 수송기 한대가 상해 강만(江灣)비행장에 도착했다. 이 한 대의 수송기에 탑승할 수 있는 인원은 불과 15명 정도였으므로 임정 국무위원 전원과 수행원을 전부 태우고 갈 수 는 없는 형편 이였다. 누가 먼저 비행기를 탈 것이냐를 두고 한독당과 민혁당이 첨예한 대립을 벌렸는데, 당연히 임정 내에서 제2인자였던 약산이 이 비행기를 타야 함에도 불구하고 약산 일파를 배제하려는 한독당측과 미국의 힘을 빌려 임정요인의 입국을 추진한 이승만의 견제 때문에 약산이 양보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 되어버렸다. 결국 국무위원으로는 김구, 김규식, 이시영, 엄항섭, 김상덕과 수행원 10명만이 제1진으로 입국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사항에 대해서 나중에 장준하는 김구 일파가 먼저 입국함으로써 임정=한독당=김구의 등식을 국내 민중들에게 심으려는 한독당측의 의도가 깊이 개입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1945년 12월 2일, 마침내 약산, 김성숙, 장건상, 유림 등 반한독당출신 국무위원들은 제2진의 일원으로 미군이 보내준 비행기에 올라 꿈에도 그리던 고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