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에 온 여승(女僧)-1
 
 [2021-08-27 오후 4:20:09]

5장 운명의 그림자

석양에 온 여승(女僧)-1

 

불공 행렬을 멀리 표충사로 떠나보낸 종가는 종일토록 빈 집처럼 한산하였다. 새로 찾아오는 내방객의 발길이 뜸해지면서 경향 각지서 찾아와 시국과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며 비분강개하던 사랑 객실의 논객들도 하나 둘씩 떠나가고, 할일 없이 시권(詩卷)이나 읊조리며 남의 집 밥만 축내는 장기 식객들 몇 사람만 남게 된 것이다.

오뉴월의 긴긴 하루해도 어느덧 저물어 서산으로 기운 저녁 햇빛이 종가 앞의 늙은 은행나무를 비추면서 생긴 거대한 나무 그림자가 행랑 용마루 위에 흑룡처럼 두 다리를 걸친 형상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은행나무 밑동의 굵은 가지 사이로 스며든 석양빛을 등에 받으며 잿빛 천을 둘러씌운 삿갓을 눌러 쓴 웬 비구니 스님 하나가 솟을대문 앞에 나타났다.

굳게 닫힌 솟을대문 안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며 기웃거리던 여승은 좀처럼 인기척이 나지 않자, 마침내 목탁을 두드리며 천수경을 읊조리기 시작하였다.

정구업진언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깊게 눌러 쓴 잿빛 삿갓으로 얼굴을 통째로 가린 여승은 단아한 몸매에 약간 처진 듯한 좁은 어깨와 연륜이 웬만큼 지펴 보이는 외양으로 보아 오십대 초반 정도는 될 성싶었다. 그러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천수경을 읊조리는 목소리만은 유난히도 낭랑하고 청아하였다.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 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도로도로 지미 사바 하.”

여승은 독경을 시작하기 전 대문 안을 기웃거릴 때에 삿갓을 한번 살짝 들어 올렸을 뿐으로 얼굴 생김새는 전혀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비록 낡았으나 풀을 빳빳하게 먹인 잿빛 바랑에다 사바(裟婆)의 온갖 고뇌를 아로새기듯이, 수십 개의 천 조각들을 서로 연결하여 한 땀 한 땀 꿰매어 만든 승복을 깔끔하게 손질하여 맵시 있게 차려입은 매무새가 그녀의 고상하고 꼼꼼한 성격과 지난 반생을 그대로 대변해 주는 듯하였다.

지엄한 상전들이 원지 출행을 떠나고 찾아오는 내방객들의 발길이 뜸해지자 청지기 서 서방마저 어디서 코를 골며 늘어지게 낮잠이라도 자고 있는 것일까? 굳게 닫힌 묵직한 솟을대문은 좀처럼 열릴 줄을 모른다.

그러나 몸매 호리호리한 비구니는 거기에 개의치 않고 얼음장 위를 굴러가는 차돌멩이처럼 청랑하고 탄력적인 목탁 소리와 함께 천수경 독경을 계속 이어 가고 있었다.

안에서 누가 나오든지 말든지 상관없이 한결같이 맑은 목소리로 읊조리는 비구니의 독경 소리는 은행나무에서 한가롭게 울려 퍼지는 매미소리와 함께 종가를 감싸고도는 석양 무렵의 나른한 적막감을 깨트리며 한동안 계속되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여승의 독경이 거의 반 식경이나 계속되었을 무렵에야 비로소 육중한 솟을대문이 삐거덕! 하고 소리를 내면서 열리는 것이었다.

커다란 바가지에 시주미를 잔뜩 퍼 가지고 뒤늦게 대문 밖으로 총총히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새댁같이 젊은 병준이의 유모 옥이네였다.

안에서 누가 나오는 것과 상관없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던 나이 지긋한 비구니의 독경 소리는, 그러나 유모가 바가지에 넉넉하게 담아 온 시주미를 느슨하게 걸머진 자신의 바랑 속에 조심조심 쏟아 부어 주는 것과 거의 동시에 거짓말처럼 멈추고 마는 것이었다.

비구니의 위아래를 유심히 살피던 옥이네가 깊게 눌러쓴 삿갓 때문에 얼굴을 좀처럼 살펴볼 수 없게 되자 그대로 단념을 하고 대문 안으로 막 사라지려고 할 때였다.

저어보살님, 잠깐만!”

비구니가 나직한 목소리로 그녀를 가만히 불러 세우는 것이다.

, 시님. 저한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옥이네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며 의아한 낯으로 비구니를 바라본다.

혹여 이 댁이 예전에 한양 도성에서 궁내부(宮內府) 칙임관(勅任官)을 지내신 승당 민 대감님 댁이 맞는지요?”

,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런 것은 와 물으시는데예?”

옥이네는 호기심이 잔뜩 실린 얼굴로 정확한 연륜을 분간할 길이 없는 비구니의 위아래를 새삼스럽게 눈여겨 살펴본다.

, 빈도는 한양에 있는 삼각산(三角山) 진관사(津寬寺)에서 탁발수행 차 내려온 객승이온데, 동래 범어사로 가는 길에 민 대감님 댁 정경부인 마나님의 안부나 한번 여쭈어 보고 갈까 하고 잠시 들러 보았습네다!”

우리 노마님께서는 표충사 절에 불공하러 가고 지금은 안 계시는 데, 이 일을 대체 우찌하면 좋습니껴?”

옥이네는 비구니가 멀리 한양에서 왔다는 바람에 허탕을 치고 돌아가는 게 딱하다는 듯이 낭패감을 감추지 못한다.

, 안 계셔도 괜찮습네다!”

비구니는 집을 제대로 찾아와서 용화 부인의 안부를 알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족하다는 듯이 황급히 두 팔을 내젓는다.

범어사로 가시는 길이라면 아직도 갈 길이 먼데 여기서 하룻밤 주무시고 가실랍니껴? 아니면 노마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쌓인 여독을 푸실 겸 아예 며칠 동안 유하시다가 만나 보시고 가시든지.”

, 아닙네다!”

완강하게 고개를 흔드는 품이 비구니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그러시다면 날이 저무는데, 갈 길을 서두르셔야겠네예. 혹시 노마님께 전할 말씀이라도 있으시면 저한테 퍼뜩 하시소!”

 

정대재/소설가